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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근하고 고기 구워 먹는 날, 냉장고에 있는 와인 중 뭘 꺼내야 할지 매번 고민이었다. 삼겹살엔 화이트가 어울린다는 말도 있고, 소고기엔 무조건 진한 레드라는 말도 있고. 실제로 여러 자리에서 고기 구이와 곁들여본 와인 네 병을 정리해봤다. 삼겹살, 한우 구이, 스테이크까지 — 어떤 병이 어떤 고기와 잘 붙었는지 기록 그대로 옮긴다.

    왜 고기엔 레드가 국룰일까

    레드 와인의 떫은맛, 즉 타닌은 고기의 지방과 만나면 입안을 헹궈주는 역할을 한다. 지방이 타닌을 부드럽게 감싸고, 타닌은 다음 한입을 다시 개운하게 만들어주는 식이다. 그래서 기름진 부위일수록 타닌이 단단한 와인이 잘 붙고, 담백한 부위엔 타닌이 약한 와인도 충분하다. 아래 세 자리는 그 원리를 그대로 확인한 경험이었다.

    삼겹살엔 아마로네 스타일 — Bussola L'Errante 2016

    이탈리아 베로나 지역, 발폴리첼라 인근에서 만든 레드다. 라벨 표기는 "Rosso Veronese"지만 포도를 말려서 당도와 농축도를 높이는 아파시멘토(appassimento) 방식으로 만들어 아마로네 스타일에 가깝다. 기름진 삼겹살과 함께 마셨을 때 남긴 기록은 이랬다.

    체리. 민트. 건과일향의 아마로네.
    맛도 달달.
    다소 기름진 삼겹살과 함께하기 괜찮았음 🍷

    건과일 특유의 단맛과 진한 체리향이 삼겹살 기름기를 눌러주지 않고 오히려 감싸는 느낌이었다. 삼겹살처럼 지방이 많고 양념이 거의 없는 부위엔, 산미보다 단맛과 농축미가 강한 아마로네 스타일이 의외로 잘 맞았다.

    소고기 구이엔 몬탈치노 옆동네 와인 — Casanova di Neri Pietra Onice

    정시청역 근처 소고기 구이 전문점 대보정에서 오픈한 병이다.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로 유명한 카사노바 디 네리 양조장의 다른 라인인데, 그날 함께 열었던 카테나 자파타 샤르도네가 완전히 묻힐 정도였다고 한다.

    레드가 너무 맛있어서 자파타 샤르도네가 묻혀버렸다.
    소고기랑 넘나 찰떡.
    체리향이 제일 기억에 남음. 비비노 평점 4.5

    같은 자리에서 함께 마신 Freemark Abbey Merlot 2019(나파 밸리)은 "나쁘지 않았던 정도"로만 남았다고 적혀 있다. 이 대목이 사실 더 흥미로운데, 두 병 다 소고기와 함께였지만 한쪽은 "찰떡"으로 기억되고 한쪽은 인상이 흐릿했다. 같은 부위라도 와인 자체의 응축도와 산미 밸런스가 페어링 만족도를 가른다는 뜻이다.

    스테이크엔 마디랑 — Château Montus, 프라임립에서

    로리스 더 프라임 립 서울에서 스테이크와 함께 마신 병이다. 마디랑은 프랑스 남서부 산지로, 타닌이 단단하기로 유명한 타나(Tannat) 품종을 주로 쓴다. 함께 곁들인 볼린저 스페셜 퀴베 샴페인은 "구운 사과 향과 맛"으로 짧게 남겼고, 정작 스테이크와의 궁합을 언급한 건 마디랑 쪽이었다.

    #로리스더프라임립 스테이크와 잘 어울렸던! 😋

    타나 품종 특유의 거친 타닌이 두꺼운 스테이크 한 점과 만나면 오히려 순해진다. 삼겹살의 부드러운 아마로네와는 정반대 접근인데, 둘 다 "그 고기에 맞는 타닌 강도"를 찾은 결과라는 점은 같다.

    네 병 비교 정리

    와인 산지·품종 함께한 고기 체감 궁합
    Bussola L'Errante 2016 이탈리아 베네토, 아마로네 스타일 삼겹살 괜찮음
    Casanova di Neri Pietra Onice 2017 이탈리아 토스카나 소고기 구이 찰떡
    Freemark Abbey Merlot 2019 미국 나파 밸리 소고기 구이(같은 자리) 인상 흐릿
    Château Montus 프랑스 마디랑, 타나 스테이크 잘 어울림

    고르는 법 — 부위별 타닌 감

    정리하자면 지방이 많고 양념이 약한 삼겹살류는 단맛·농축도가 있는 아마로네 스타일이나 리파소처럼 진한 레드가 잘 붙는다. 살코기 위주의 소고기 구이나 스테이크는 타닌이 확실히 서 있는 와인 쪽이 고기 맛을 더 살려준다. 반대로 타닌이 약하고 밋밋한 레드(이번엔 프리마크 애비 메를로가 그랬다)는 두꺼운 고기 앞에서 존재감이 옅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굽기 정도도 변수다

    같은 소고기라도 굽기 정도에 따라 어울리는 와인이 살짝 달라진다. 레어에 가깝게 구우면 육즙과 철분 특유의 향이 살아 있어서 산미가 도드라지는 와인과도 잘 붙는다. 반대로 웰던에 가깝게 오래 구운 고기는 겉이 캐러멜라이즈되면서 단맛과 스모키한 향이 강해지므로, 이번 카사노바 디 네리처럼 응축도 높고 체리향이 진한 레드가 그 풍미를 받쳐주는 편이 낫다. 프라임 립처럼 오래 로스팅한 두꺼운 고기엔 마디랑처럼 타닌이 확실한 와인이 밀리지 않고 버텨준다.

    참고로 로리스 더 프라임 립 자리에서 함께 열었던 볼린저 스페셜 퀴베는 스테이크보다는 그 전에 나온 구운 사과향 애피타이저와 더 잘 붙었다. 메인 요리 하나에 와인 하나를 고정하기보다, 코스가 바뀔 때마다 병을 바꿔가며 마시는 편이 각 요리의 특징을 살리는 데 유리했다.

    Q&A

    Q. 삼겹살엔 화이트 와인이 낫다는 말도 있던데?

    양념 없이 소금장에만 찍어 먹는 삼겹살이라면 산미 좋은 화이트도 나쁘지 않다. 다만 이번처럼 기름기가 많은 부위엔 단맛 있는 진한 레드도 잘 맞았다. 정답이 하나는 아니고, 양념 여부와 굽기 정도에 따라 갈린다.

    Q. 마디랑처럼 타닌 센 와인은 초보자에게 부담스럽지 않나?

    스테이크 없이 단독으로 마시면 떫은맛이 두드러질 수 있다. 하지만 두꺼운 고기와 같이 마시면 지방이 타닌을 감싸주면서 훨씬 부드럽게 느껴진다. 오히려 고기 없이 마디랑만 딴다면 실망할 확률이 높다.

    Q. 같은 자리에서 두 병을 열었는데 한쪽만 인상 깊었던 이유는?

    와인 자체의 밸런스 차이다. 프리마크 애비 메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특징이 뚜렷하지 않았고, 카사노바 디 네리는 체리향과 응축도가 확실해서 소고기 지방을 뚫고 인상에 남았다. 페어링이 잘 되려면 고기 궁합 이전에 와인 자체가 또렷해야 한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Q. 이 와인들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나?

    아마로네 스타일과 마디랑은 와인샵이나 온라인몰에서 검색하면 나오지만 흔한 재고는 아니다. 프리마크 애비 메를로 정도가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좋은 편이고, 나머지는 수입사 재고 상황에 따라 다르니 방문 전 확인하는 게 안전하다.

    Q. 굳이 비싼 레드가 아니어도 고기 구이엔 다 어울리나?

    기본적으로는 타닌만 있으면 방향은 맞는다. 다만 이번에 확인한 것처럼 응축도와 향이 또렷한 와인일수록 고기 지방에 눌리지 않고 끝까지 존재감을 유지했다. 가벼운 캐주얼 레드는 얇게 썬 고기나 가벼운 양념 요리엔 잘 맞지만, 두꺼운 스테이크나 덩어리 고기 앞에서는 다소 힘이 부칠 수 있다.

    이 기록들은 인스타그램 @wine.with.u에 남긴 것을 그대로 옮겼다. 페어링을 다룬 다른 글도 참고하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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